공관 안내
주한 영국대사관저의 어제와 오늘
영국과 한국의 외교관계는1882년 최초의 조약체결 협상과 함께 시작되었다. (영-한 관계 역사는 이곳을 클릭하기 바람). 조약협상 타결과 함께 한국어를 구사하는 윌리엄 조지 아스턴(William George Aston) 영사가 최초의 주한 총영사로 부임했고,그는 부임 후 곧바로 서울에 첫 영국 외교부지 물색작업에 나섰다. 아스턴 총영사는 자신이 묵고 있던 당시 덕수궁 옆 부지가 적격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곳은 원래 왕실 소유였으나, 실제로는 고관들의 손에 넘어간 뒤 거의 방치된 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왕실은 순순히 그곳을 4대문 안 외국인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내주었고, 그곳은 이후 서울에 와 있던 외국인들의 주거 중심지가 되었다.
영국 외교부지는 자그마한 언덕 위 700평방야드 정도 규모로, 고층건물이 없던 당시의 아담한 도시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었다.당시 총영사관 건물은 한옥이었으며, 마당을 중심으로 여러 채의 작은 건물이 빙 둘러싸고 있었고, 대부분 수리도 제대로 안된 낡은 건물이었다. 1884년 당시 시가로 1만 500량(약200파운드) 에 거래가 이루어졌다.
부지는 당시 그곳 낡은 한옥에 살고 있던 최초의 영사관 직원들이 구입했다. 1880년대 말,영사관 직원 몇 명이 병이 들었는데,열악한 건물 상태도 그와 무관치 않았다. 그리하여 영국 외교관들이 묵을 새 건물을 그곳에 세우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1889년 1월 18일, 상하이 Office of Works 에 근무하던 미스터 마셜(Mr Marshall)이 새로 지을 건물의 예비 설계도를 예상 건축비 세부항목과 함께 런던으로 보냈다. 설계도는 넓은 베란다가 딸린 2층 건물 세트로 이루어져 있는데,중국 연안에 지은 영국 영사관 건물 표준 디자인이었다. 총영사 관저인 넘버원 하우스는 작은 언덕 꼭대기에 세워졌는데,영사관 건물 두 채 중 약간 큰 쪽이었다. 바닥에는 대형 L 자형으로 리셉션룸과,총영사 집무실,응접실,식당이 정원이 보이도록 배치돼 있었다. 부엌과 시중꾼들이 머무는 곳은 뒤쪽 별채에 있었다. 2층에는 4개의 침실이 있고,침실마다 욕실이 딸려 있었다.
또 다른 한 채는 넘버원 하우스와 대문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규모가 더 작고 정사각형에 가까운 건물이었다. 언덕 약간 아래쪽에는 부총영사와 기록원 집무실이 있었고,현지 채용 직원과 시중꾼들이 머무는 건물이 여러 채 자리하고 있었다. 1889년 4월에 재무부로부터 건물 신축 최종 승인이 떨어졌고,1890년 5월 중순에는 착공준비가 마무리되어 원래 있던 건물들이 철거됐다.
1890년 7월 19일,워터 힐리어(Water Hillier) 총영사의 부인인 힐리어부인이 총영사관저의 주춧돌을 놓았다. 주춧돌에는 당시 연도를 빅토리아여왕 치세 54년, 광서제(光緖帝) 8년,조선 499년이라고 적었다. 이 주춧돌은 현재 대사관저로 쓰이는 하우스 넘버원의 현관에 놓여져 있다. 건물은 착공 1년만에 완공되었다.
1891년 가을,힐리어 총영사 가족은 나머지 건물 공사가 진행중인 가운데 새 건물 2층에 입주했다. 1892년 5월에 신축공사는 마무리되었다. 힐리어 총영사는 당시 토지 비용을 포함한 신축비용이 6213 파운드라고 보고했다 . 힐리어 총영사는 신축 건물들에 대한 현지의 관심이 매우 높으며,고종황제도 인접한 덕수궁에서 공사진척 상황을 관심있게 지켜보았고,건축계획과 완공 뒤의 사진들을 보여줄 것을 요청했다고 보고했다. 가까운 곳에 있는 미국 공사도 당시 이 건물을 두고 “이 나라에 대한 (영국정부의)관심을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촌평했다. 몇 년 뒤, Korean Repository 는 이 건물들을 “서울에 있는 최고의 걸작 건축물 두 채”라고 불렀다.
각종 특별한 행사들을 위해 잔디밭을 포함한 관저 내 정원도 만들어졌다. 1897년에는 빅토리아여왕 즉위 60주년 기념행사가 한국 및 외국 귀빈들을 초청한 가운데 성대히 열렸으며, 여왕탄신일 기념 가든파티는 정례 행사로 자리잡았다. 테니스 코트도 만들었다. 회자되는 (충분히 그랬을 법한) 이야기로는 고종황제가 민비와 함께 인접한 덕수궁에서 테니스 경기 광경을 보면서,왜 지체 높은 외국인들이 종들을 대신 시키지 않고, 몸소 어려운 운동을 하는지 궁금해했다고 한다!
1920년대가 되자 서울은 대규모 외국인 커뮤니티와 훌륭한 도로,각종 시설물들이 들어선 근대적인 도시가 되었다. 1928년에는 영사관에 전기가 들어왔다. 1930년대 말에는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면서,일본이 한국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을 점차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되었고,이들의 생활에는 많은 제약이 가해졌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의 불꽃이 한국으로 번지며 영국 커뮤니티는 크게 위축되었다. 이듬해인 1942년에는 총영사관 직원들이 영사관에 억류되었다가,일본으로 보내져 강제송환당했다. 공관 직원들이 떠남에 따라,공관 관리는 스위스 총영사관의 손에 넘겨졌으나,관리가 제대로 안돼 황폐화되다시피 했다.
1945년 한국이 해방될 때 영국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고,그해 말이 되서야 영국 관리가 서울을 방문해서 총영사관의 상태를 살펴 보았다. 관리가 안된 건물 두 채 모두 폐가가 되었고,1942년 이후 손질을 안 한 정원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면 크게 손질이 필요했다. 1940년대말까지 총영사관의 외교관 수는 꾸준히 늘어서,분단된 한반도 정세를 분석하고 보고하는 일에 많은 이들이 매달렸다.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영국 커뮤니티는 출국권고를 받았고,미군의 도움으로 소개되었다. 총영사관 직원 대부분은 영국이 중립을 유지할 것으로 믿고 계속 공관에 머물렀다. BBC 월드 서비스를 통해 영국이 유엔의 한국전 개입을 지지한다는 보도를 들을 때까지 그렇게 믿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처음에는 공관 직원들한테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7월 2일 오후 늦게,북한군 장교들이 들이닥쳐 직원들을 서울시경으로 끌고간 다음 평양으로 데려갔다. 이후 공관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서울 전역에서 압수해 온 가구,기타 물품을 보관하는 장소로 쓰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우스 넘버원은 인근의 라디오방송국이 파괴되면서 약간 손상을 입었다. 하우스 넘버원은 또한 총탄 자국이 군데군데 난 벽돌들도 교체해야 했다. 이곳은 한때 중공군이 차지한 적도 있고,이후 영국군,호주군도 이곳을 군대 집결지로 사용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이곳에 서 있던 건물들은 1953년 2월에 상태가 형편 없었다. 당시 서울을 찾은 영국육군공병대 소속 장교인 F M 힐 (F M Hill) 대령은 놀라고 감격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건물의 기본 뼈대가 파괴되지 않고 사실상 그대로 있다! 솔직히 나는 이 두 채보다 더 끔찍한 건물을 본 적이 없다. 현대적이고 안락한 건축물을 세울 수 있도록 건물이 폭격당해 산산히 부서져 없어지지 않은 게 정말 유감이다."
힐 대령의 생각과 달리,건물 수리작업이 시작되었고,1954년 1월에 공관은 정식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다시 문을 연 공관이 수행한 첫번째 행사는 1954년 2월 12일,한국 외무장관이 참석한 비공식 리셉션이었다. 그리고 그해 6월에는 여왕탄신일 축하파티가 공관에서 다시 열렸다. 1957년 영국의 외교 공관 지위가 대사관급으로 격상되며 휴버트 J 에번스(Hubert J Evans) 당시 공사가 초대 주한대사가 되었다. 하우스 넘버원은 영국대사 관저로 바뀌었다.
건물 착공 이후 115년 넘게,하우스 넘버원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며,첫 완공 당시 모습과 거의 그대로다. 대사관저는 대사와 대사 가족이 사는 집으로 쓰일 뿐만 아니라, 공식 리셉션,파티,상업적인 행사 개최 등 대사관 업무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건물 역사상 하이라이트 가운데 하나는 1999년 여왕 방한기간 중에 여왕과 한국전 참전 영국 퇴역 군인들을 위한 가든파티가 열린 것이다. 그러한 행사들은 거슬러올라가면 초대 주한 영국 총영사관 직원들이 이곳에서 주최했던 만찬들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싼 고층건물들 속에 널찍하게 자리잡은 정원을 보고는,번잡한 서울 도심 한가운데 이렇듯 숨겨진 오아시스가 있었나 하고 놀라게 된다. 대사관저를 비롯한 대사관 내 여러 건물들은 1880년대 이후 한국이 겪어온 슬픈 역사의 일부분이다. 오래 전에 작고한 그 미국 공사의 말처럼,이 건물들은 지난 100년간 영국이 한국에 대해 기울여 온 관심과 참여를 보여주는 산 증인이다.
이 글은 짐 호어 (Jim Hoare) 박사의 글을 바탕으로 썼다. 호어박사는 1981-1985년 주한영국대사관 Head of Chancery 를 지냈고,이후 초대 북한 주재 영국 대리대사(Chargé d'Affaires)를 역임했다.
주한영국대사관 대사관저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