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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관계

State visit by former President Roh and the First lady

노무현 전대통령 내외의 국빈 방문

서두

한국에 대한 영국의 관심은 17 세기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과 한국의 부(富)에 대한 명성은 포르투갈인들을 통해 유럽에 알려졌고 영국에 처음 알려진 것은 1598-1600 년 사이에 출판된 리차드 해클루이트의 '영국의 주요 항해와 발견'을 통해서다.
영국의 관심은 18 세기 말에 다시 고조되었다. 중국과의 교역의 증가는 동아시아 해역을 항해하는 서양 선박의 증가를 가져왔고 이는 측량 작업의 필요성을 야기시켰다. 이러한 필요성 때문에 윌리엄 브로튼 선장은 1794 년부터 1798 년까지 '프로비던스'호를 타고 북태평양과 아시아 해역을 항해했으며 항해 도중 1797년 10월과 11월 한국 해안에 도착했다. 브로튼 선함과 그의 부하들은 부산에 상륙했다.

1832년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새로운 시장을 탐색하기 위해 중국의 북쪽 해안을 따라 '로드 애머스트'호를 보냈다. 한국을 방문한 이 선박에는 한국에 몇 권의 성경을 보급한 찰스(또는 칼) 거츨라프 목사가 타고 있었다. 1870년대에는 중국 북부에 파견된 선교사 존 로스 목사가 복음서를 최초로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영국 외교관은 나가사키 주재 영사였던 조지프 롱포드로 그가 방문한 해는 1875 년이었다. 롱포드도 그 전의 방문자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인들로부터 적대적 대접을 받았다.

1882-1883 조약 체결

1882년 영국은 중국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윌리스 해군 중장을 한국에 파견했다. 필요한 경우 조약을 맺기 위해 협상할 수 있는 재량이 그에게 부여되었다. 1882년 윌리스 중장은 인천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윌리스의 조약은 영국 내에서 극심한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처음 그들은 윌리스의 조약을 수정하려고 했지만 곧 영국의 목표를 달성하고 반대 의견을 참작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조약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명백해 졌다. 1883년 11월 영국과 독일이 한국과 공동 협상에 들어갔다. 주중 공사 파크스가 서울에 도착하여 파크스의 오랜 친구였던 요코하마 주재 독일 총영사 헤르 차페와 합류했다. 협상은 어려웠지만 마침내 1883년 11월 26일 경복궁에서 새로운 우정, 통상, 항해 조약에 서명하게 되었다. 이 조약은 그 후 1910년까지 한국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들의 기반이 되었다.

1884-1890 조약 이행

파크스는 자신이 북경에 계속 주재하면서 주한 영국 공사도 겸임하고 일시적으로나마 한국에 영사관도 주재시킬 것을 제안했다. W G 애스톤이 영사관 부지를 물색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1884년 5월 퇴락한 전의 왕궁이 있는 부근인 정동에 약간의 토지 구입 계약을 맺었다. 이 토지는 1,200 멕시코 달러, 영화(英貨) 약 225 파운드로 구입되어 현재는 주한 영국 대사관이 위치해 있다. 이곳에 한국식으로 공관과 관저가 세워졌고 영국 외교 사절단이 업무를 시작했다.

1885-1887 해밀톤 항 - 거문도

1885년 영국은 러시아가 한국 북동부 해안의 항구를 점령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면서 해밀톤 항(거문도)을 점령키로 결정했다. 영국 해군은 1885년 4월 내각의 지시에 따라 3척의 군함을 해밀톤 항에 파견했지만 처음에는 이곳에 영국기를 게양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한국 정부와 협상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중국과 일본도 이 문제가 자국의 이익에 직접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도 중국 정부와 일본 정부에도 통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1886년 아프가니스탄으로 인해 발생된 영국과 러시아 간의 긴장이 완화되었을 때 영국은 해밀톤 항에서의 철수를 결정했다.

1887-1890 관계 강화

1888년 북경 주재 공사 겸 서울 주재 공사는 서울과 제물포를 정식 주재지로 하자고 제안했다. 그에 따라 1890년과 91년 서울 부지에 있던 대부분의 낡은 건물들을 헐고 정통 중국 해안식 영국 공관과 관저들이 건축되기 시작했다.
1890년대에 한국을 방문한 주요한 영국인들은 유명한 여성 여행가 비숍 여사와 나중에 작위를 받은 장래의 커즌 경이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한국에 관한 귀중한 저서를 남겼으며 이 두 저서들은 현재 한글로 번역되어 아직도 인용되고 있다.
1890 년대에는 한국 정부가 고용한 영국인 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맨 처음 고용된 사람들 중에는 1883년부터 85년까지 대한제국 외무성의 독일인 고문 P G 폰 뮐렌도르프의 비서로 일한 W 두 플론 허친슨도 있었다. 1880 년대 후기에 잠시 동안 영국인 기술자가 경복궁의 전기 조명을 담당한 적이 있다. 1896년 전 샹하이 경찰이었던 스트리플링이 새로 조직된 한국 경찰국의 고문이 되었다. 영국 해병대 콜웰 중위가 한국군에게 훈련을 가르쳤으며 그와 성공회 평수사 한 명이 최초의 한국 축구선수들을 훈련시켰다.

1900-1910 영일 동맹과 한일 합방

1898년 북경 주재 영국 공사관과 서울 영사관 사이의 관계가 끊어졌다. 총영사 존 조던은 처음에는 대리 공사로 임명되었다가 1901년 변리공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직무는 1905년까지만 존속되었다. 1902년 영일 동맹이 체결되었다. 영국의 위치는 다른 국가들의 위치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2차 영일 동맹으로 한일 합방을 묵인한 일이 한국인들의 원성을 샀다.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1905년 이후 일어난 변화를 수용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몇 사람들 중 가장 저명했던 사람은 영국 기자 어니스트 배설이었다. 배설은 독립적으로 신문을 창간했는데 이 신문은 처음에는 한영 2개 국어로 발간되었다. 배설은 곧 반일 입장을 취했다. 일본 당국은 한국에서 여전히 운영되고 있던 영사관 법정을 통해 그를 교정하려고 노력했다. 배설은 유죄 선고를 받고 마침내 샹하이 교도소에 투옥되었다. 그는 석방되자 한국에 돌아왔고 1909년 사망했다.

1910-1941 일본 식민지 시대

1910년 후에는 변화가 있었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이 식민지를 다른 국가들과 공유하려 하지 않았다. 영국의 공식적 위치는 1910년 이후 축소되었을 수도 있지만 공식적 관심은 그렇지 않았다. 1905년 이후 일본의 한국 통치를 받아들인 영국 정부는 일본이 자국의 위상을 강화하고 있었던 시기에 있었던 일본의 잔학 행위에 대한 주장을 공식적으로는 심각하게 반박하지 않았다. 그것을 일본 식민지 지배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행위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9년 3.1 운동 때 영국 정부는 일본의 행위에 대해 훨씬 더 비판적이었다. 영국 정부는 일본의 식민 정치를 비난하는 고발장을 작성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외국 기업들의 운영이 더욱 더 어려워졌다. 그러나 대세를 이루고 있던 선교 활동은 식민지 시대 동안 전혀 쇠퇴하지 않았다.

1945-1950 영국의 재등장

한국에 대한 영국의 역할은 독립 전 장기간의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데 한정되어 있었다. 한국이 "적당한 시기에" 자유 독립 국가가 된다는 언급이 연합국의 입장에 포함된 것은 영국의 주장 때문이었다.
1946년부터 50년까지는 영국의 외교 사절단이 한국에 점차 재확립된 시기이다. 1948년 대한민국(ROK)이 수립된 후 영국 공사관이 다시 주재하게 되었고 당시의 총영사 비비언 홀트 대위가 1949년 3월 최초의 공사가 되었다. 한국 공사관도 런던에 개관되었다.

1950-1953 한국 전쟁

1950년 6월 한국전이 일어났을 때 영국 정부는 북한의 행위를 즉각 비난했다. 영국은 미군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한국에 파견했다. 8만 7,000명의 영국군이 한국전에 참전, 1,000명 이상의 영국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영국군이 참여한 많은 전투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51년 4월 영국 제29 보병 여단이 싸운 '임진강 전투'다. 영국 공사 비비언 홀트는 전쟁이 처음 발발했을 때 서울에 남아있는 것이 그의 의무이며 외교관으로서의 위치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고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1950년 7월 홀트와 다른 외국인들은 북한군에 억류되어 한반도 북쪽 끝까지 유명한 죽음의 행진에 끌려갔다. 1953년 초가 되어서야 비로소 홀트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는 1953년 4월 석방되었다.

1953-2005 발전하는 한영 관계

양국의 외교 사절단을 1957년 대사관으로 격상시킨 일은 새로운 관계 수립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가 있다. – 주한 영국 대사관은 2007년 축하행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 1973년 주한 영국 문화원이 서울에 설립되면서 양국 관계에 새로운 차원이 부가되었다. 1950년대부터 1890년에 건축된 두 채의 건물들이 주한 영국대사관 구내의 중심부에 남아 있고 주한영국대사도 여전히 오래된 관저에서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대사관에서는 세 번의 주요 개축 공사가 있었는데 1992년 현대식 대사관 건물을 건축한 마지막 공사로 개축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이 기간 동안 양국간의 문화적 관계도 더 긴밀해졌다. 영국에서 유학하는 한국인들의 수는 한국전 이후 꾸준히 증가해 왔다. 1990년대에는 유학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2005년에는 1만 7,000명을 넘어섰다. 매년 많은 한국 학생들이 영국 정부가 수여하는 쉬브닝 장학금 (영국 외무성 장학금) 의 혜택을 입고 있다. 이 장학금은 다양한 분야들에서 공부하는 대학원 과정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지원한다. ( 쉬브닝 장학금 정보보기)

양국 관계의 획기적 사건은 1999년 4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에딘버러공이 한국을 공식 방문한 것이다. 여왕 부처는 청와대에서 열린 환영 의전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공식 영접을 받았으며 광범위한 행사들로 짜여진 일정을 보냈다. 이채로웠던 행사로는 여왕이 안동 지방의 하회 마을을 방문했던 행사가 있다. 안동 지방에서 여왕은 한국 전통 문화의 여러 가지 모습을 접할 기회를 가졌다. 여왕 부처는 서울에서 다수의 한영 기업 지도자들을 접견하기도 했다. 양국 관계의 초점은 이제 점차 경제적∙사업적인 관계로 옮아가고 있다. 1982년 영국 상공회의소가 서울에 설립되었다. 1964년에는 양국간의 무역액이 1,000만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2005년에는 양국간의 무역액이 84억 달러에 이르렀다. 1990년대에는 다수의 한국 기업들이 영국에 투자했다. 영국 기업들도 한국의 시장 개방에 응해, 한국에 대한 투자액이 현재 1,000만 달러를 넘어서고 있다.

2004년 12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초청을 받아 방영했다. 이 방영은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영국을 국빈 방문한 행사로서 점차 성숙해 가는 양국 관계를 반영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영국 여왕은 국빈 방문 초청을 매년 두 번에 하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 내외는 런던 한인 사회 대표들을 접견하기 위해 세인트 제임스 궁에서 열린 리셉션에 참석하고 근위기병대의 열병식이 열리는 가운데 영국 여왕 부처의 성대한 공식 환영을 받은 후 버킹엄 궁까지 마차를 타고 행진했다. 방영 첫날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을 방문하여 무명용사들의 묘지에 헌화하고 세인트 폴 대성당을 방문하여 한국전 기념관에서도 헌화했다. 또 노대통령은 영국 야당과 자유민주당의 지도자들을 접견하고 한국전 참전 영국 용사들을 위한 리셉션에도 참석했다. 저녁에는 몇몇 왕실 가족들과 다양한 계층의 지도적 인물들이 참석한 가운데 버킹엄 궁에서 공식 만찬이 열렸다.

둘째 날에는 노대통령은 '제5차 한영 산업기술 협력 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저녁에 노대통령 내외는 런던 시장의 초대를 받아 시티 어브 런던에 소재한, 15세기에 건립된 런던 시청 길드홀에서 75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성대한 만찬에 참석했다.

이번 방영에는 한편으로는 공식 방문에 따른 성대한 의전, 근위기병대에 대한 세밀한 열병식, 한국전 참전 용사들과의 만남 등 역사적, 의전적 요소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대통령의 ‘한영 산업기술 협력 포럼’ 참석이라는 현대적∙역동적 요소가 있어서 이 두 측면이 정교하게 균형을 이루었다. ‘한영 산업기술 협력 포럼’에는 양국에서 500명이 참석해서 약 400건의 기업 대 기업 간 회합들이 성사되었으며 다수의 가장 혁신적인 한영 기업들의 최고위급 대표들이 참석한 원탁회의도 열렸다. 이것은 한영 관계의 양면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한 면은 지난 120년 동안 꾸준히 성장하고 강화되어 온 우호 관계이고 다른 한 면은 양국 모두에 큰 이익을 가져다 준 현대적∙역동적인 협력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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